
AI 데이터센터는 사상 최대 속도로 늘어나고 있지만, 그 데이터센터를 켜는 전기와 그 전기를 실어나를 송전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전력 부족이 아니라 ‘전력의 정치화’다. 그리고 이 정치가 한국 반도체 사이클과 글로벌 자본 흐름까지 흔들기 시작했다.
핵심 요약
– 미국 최대 전력시장 PJM은 2024년 7월 시행한 2025–26년 용량 경매에서 메가와트-일당 269.92 달러라는 기록적 가격으로 낙찰됐다. 직전 해 28.92 달러 대비 약 9배 가까이 오른 수치다. 시장이 처음으로 ‘전력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간다’를 가격으로 인정한 사건이다.
– 데이터센터, 특히 하이퍼스케일러 AI 시설은 단일 단지가 1기가와트(GW)에 육박하는 수요를 요구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과 로런스버클리연구소(LBNL)는 2028년경 미국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전체 전력의 7~12 퍼센트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본다.
– 문제는 발전이 아니라 송전이다. 미국에서 새 송전선 1기를 짓는 데 평균 7~10 년이 걸리고, 다수 주를 가로지르는 노선은 그 이상이 걸린다. 발전소는 ‘짓겠다’는 결정만으로는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 송전 인터커넥션 큐에 잡힌 신청 용량은 이미 2,600GW를 넘어, 미국 전체 설비용량의 두 배가 넘는다.
– 하이퍼스케일러는 임시 해법으로 기존 원전과의 직거래(Behind-the-meter PPA)에 베팅했다. 마이크로소프트–컨스털레이션의 스리마일 1호기 재가동 합의, 아마존–탈렌의 서스쿼해나 인접 단지 배치, 메타–컨스털레이션의 클린턴 원전 PPA가 그 사례다. 그러나 FERC는 이런 ‘기존 원전의 격리 매매’가 다른 소비자에게 비용을 전가한다며 일부 거래에 제동을 걸었다.
– 결과적으로 송전망 건설은 더 이상 엔지니어링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가 됐다. 누가 망 비용을 부담할지, 누가 토지·환경 인허가의 대가를 치를지, 어느 주가 다른 주의 데이터센터 부담을 떠안을지가 의회와 주 의회의 다음 1년 의제가 됐다.
– 이 흐름은 한국에 양면적이다. 한쪽에선 메모리·HBM·고성능 패키징 수요가 더 길고 깊게 유지될 수 있다. 다른 한쪽에선 미국 송전망 인프라 ― 변압기, GIS, HVDC 케이블, 지중화 자재 ― 가 새로운 한국 수출 모멘텀을 만들 수 있다. 즉 ‘AI 전력난’은 한국에 단순 호재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산업 정책 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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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왜 갑자기 ‘전기’가 거시 변수가 됐나
20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의 전력 수요는 거의 정체였다. 효율 개선과 산업 공동화로 1인당 전력 소비량은 오히려 줄어드는 추세였다. 그런데 2023년 이후 이 그림이 깨졌다. 이유는 단순하다. AI 학습용 GPU 클러스터의 한 단지가 과거 도시 한 곳 분량의 전력을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IA는 2024년 단기 전망에서 처음으로 데이터센터를 별도 수요 항목으로 끌어내야 했고, EPRI 보고서는 “2030년까지 미국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두 배가 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LBNL의 2024년 보고서는 시나리오에 따라 2028년 데이터센터가 미국 전체 전력 사용량의 6.7~12 퍼센트를 차지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같은 보고서는 이 수치가 2018년 1.9 퍼센트에서 약 4~6배 빠르게 커지는 경로라고 강조했다.
이 변화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거시적으로 보면 미국에서 ‘전력 부족’은 이제 산업 정책·금리·공급망·외교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변수다. 데이터센터를 어디에 지을 수 있느냐가 곧 미국 AI 산업의 입지 경쟁력이 되고, 그 입지 경쟁력이 결국 글로벌 자본의 이동을 끌어당긴다.
2장. PJM 용량 경매 9배 폭등이 신호한 것
가장 분명한 신호는 가격이다. 2024년 7월 30일 PJM Interconnection이 발표한 2025–26년도 용량 경매 결과는 시장에 충격을 줬다. 낙찰 가격은 메가와트-일당 269.92 달러로 이전 해의 28.92 달러 대비 약 833 퍼센트 폭등했다. 이 가격은 PJM 전 권역에 적용되며, 펜실베이니아·뉴저지·메릴랜드·오하이오·버지니아 등 미국 동부 13개 주 일부와 워싱턴 D.C.를 포함하는 시장 전체의 ‘공급 부족 비용’을 그대로 청구서로 만든 셈이 됐다.
2025년 7월 발표된 다음 해 경매는 더 극적이었다. 2026–27년도 용량 가격은 그대로 PJM이 설정한 가격 상한 부근에 머물렀고, PJM 자체 추정으로 시장 전체에 16억 달러 규모의 새 비용을 추가했다. 시장 가격이 두 해 연속 상한 가까이에서 형성됐다는 사실은, 단발성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공급 부족이라는 뜻이다.
가격 폭등의 배경은 세 가지가 결합된 결과다. 첫째, 데이터센터 신규 부하가 PJM 권역, 특히 버지니아 북부에 집중됐다. 둘째, 노후 석탄·가스 발전소의 은퇴 속도가 신규 발전 도입 속도보다 빨랐다. 셋째, 신규 발전소의 인터커넥션 절차가 늦어 경매에 들어올 수 없는 자원이 너무 많았다.
이 결과는 PJM 한 시장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ERCOT(텍사스), MISO(중서부), CAISO(캘리포니아) 등 다른 주요 시장도 비슷한 부하 증가에 직면해 있고, 시장 운영자들은 일제히 “예비율이 위험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즉 PJM의 269.92 달러는 미국 전력 시장 전체의 미래 가격을 미리 보여준 신호탄이었다.
3장. 데이터센터를 짓는 속도와 송전선을 짓는 속도의 격차
문제의 본질은 발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발전된 전기를 ‘옮길 길’이 부족해서다.
미국의 송전망 건설 속도는 1990년대 이후 사실상 정체였다. 노후 회랑 보강 위주로 진행됐고, 새 장거리 송전선이 새로 깔리는 일은 드물었다. 이런 가운데 2010년대부터 신규 풍력·태양광 발전소가 인터커넥션 큐에 쏟아져 들어왔고, 2020년대엔 데이터센터가 추가됐다. 결과적으로 인터커넥션 큐에 들어 있는 신규 자원의 총 용량은 2024년 말 기준 2,600GW를 넘었다. 이는 미국 전체 발전 설비 용량(약 1,200GW)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큐가 쌓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새 발전기를 망에 연결하려면 인근 송전망 보강이 필요하고, 그 보강 비용을 누구에게 청구할지가 결정되지 않으면 절차가 멈춘다. 평균 처리 기간은 5년을 넘어가며, 일부 사례는 7~10 년 이상이다. FERC는 2023년 7월 Order 2023을 통해 큐 운영을 ‘선착순’에서 ‘클러스터 단위 일괄 처리’로 바꾸도록 지시했지만, 그 효과가 가시화되려면 몇 년이 더 필요하다.
데이터센터는 이런 호흡과 정반대로 움직인다. 하이퍼스케일러 한 곳은 1년에 수십 GW 단위의 신규 시설 계획을 발표한다. ‘짓겠다는 발표’와 ‘쓸 수 있는 전기’ 사이의 시간 격차가 처음으로 산업 전략의 중심 변수가 된 것이다.
4장. 원전 직거래는 응급 처방이지, 해법이 아니다
기다릴 수 없는 하이퍼스케일러는 다른 길을 찾았다. 기존 원전과 직접 PPA를 맺어, 송전망을 거치지 않거나 사실상 격리된 회로로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2024년 9월 발표된 마이크로소프트–컨스털레이션 에너지의 합의다. 1979년 사고로 잘 알려진 펜실베이니아 스리마일 섬 1호기를 컨스털레이션이 ‘크레인 클린 에너지센터’라는 이름으로 재가동하고, 발전 전력 전량을 마이크로소프트에 20년간 공급한다는 내용이다. 같은 해 아마존은 펜실베이니아 서스쿼해나 원전 부지에 데이터센터 캠퍼스를 인수해 ‘behind-the-meter’ 형태로 배치했고, 2025년 메타도 일리노이 클린턴 원전과 20년 PPA를 체결했다.
이 거래들은 단기적으론 우아해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이미 망에 연결돼 있던 원전 출력을 한 기업이 격리 매수하는 구조다. 즉 새로운 발전을 더한 것이 아니라, 기존 깨끗한 전력을 재분배한 것이다. FERC는 2024년 11월 아마존–탈렌의 서스쿼해나 인접 단지 확장안을 잠정 부결하면서, 이 점을 정확히 짚었다. 다른 소비자가 부담해야 할 망 비용이 일부 부유한 단일 고객에 의해 회피될 수 있다는 우려다.
둘째, 원전은 더 이상 늘리기 쉽지 않다. 신규 대형 원자로의 미국 내 건설 사례는 보글 3·4호기가 사실상 마지막이고, SMR(소형모듈원자로)은 상업 운전까지 최소 수년이 더 필요하다. 즉 하이퍼스케일러의 ‘원전 직거래’는 다음 5년 동안 일부 거대 기업의 수요를 빨아들일 수 있어도, 시장 전체의 공급 부족을 풀지 못한다.
결국 문제는 다시 송전이다. 발전을 새로 늘려도, 그 전기를 데이터센터까지 옮길 망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5장. 송전망 건설은 기술이 아니라 정치 문제다
송전선 한 기를 짓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토지 사용권, 환경 인허가, 그리고 비용 분담이다. 이 셋 모두 기술이 아니라 정치다.
연방 차원에서 FERC는 2024년 5월 Order 1920을 채택했다. 이는 송전 운영자들이 20년 단위 장기 계획을 의무적으로 수립하고, 비용 분담 원칙을 사전에 결정하도록 한 새로운 규칙이다. 동시에 백악관은 2024년 4월 ‘송전 가속화 행동계획(Federal-State Modern Grid Deployment Initiative)’에서 2035년까지 미국 송전 용량을 60 퍼센트 늘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 계획의 실행은 주 정부와 지역 송전 운영자(RTO/ISO), 그리고 토지 소유자, 환경단체, 인근 주민 사이의 합의에 달려 있다.
지역 정치는 더 험하다. 다른 주에서 생산된 전기를 자기 주 위로 통과시키는 송전선에 대한 반대는 거의 모든 주에서 강하다. 메인 주가 캐나다 수력 전력을 매사추세츠로 보내기 위한 NECEC 송전선을 두고 2021년 주민투표에서 사실상 부결시켰던 사례, 그리고 2020년대 들어 미시간·일리노이·뉴욕 등에서 반복된 ‘not in my backyard(NIMBY)’ 분쟁은 모두 같은 패턴을 공유한다.
여기에 ‘누가 데이터센터의 망 부담을 낼 것인가’라는 새 질문이 더해졌다. PJM 권역 일부 주에서는 이미 데이터센터 단일 고객에게 별도 요금 등급을 적용하거나, 신규 부하 접속 시 ‘공급보장 요건’을 부과하는 방안이 논의 중이다. 버지니아 주 의회는 2025년 회기에서 이 논의를 본격화했고, 오하이오·텍사스도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모든 변화는 한 가지를 의미한다. 송전망은 더 이상 단순 인프라가 아니라, 산업 정책·연방-주 권한 분쟁·소비자 보호의 교차점이 됐다.
6장. 한국에 왜 이게 거시 변수인가
한국 입장에서 미국 전력난은 두 개의 동시 신호를 보낸다.
첫째, AI 인프라 수요는 단기적으론 더 강해질 가능성이 높다. 데이터센터를 즉시 짓지 못한다는 사실은 ‘짓고 있는 데이터센터의 가치’를 더 끌어올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칩 한 장의 가치도 더 끌어올린다. HBM, 고성능 메모리, 첨단 패키징(특히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메모리), 고대역 네트워크 부품의 수익성이 더 길게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둘째, 한국에 새로 열리는 것은 ‘전력 인프라 자재 수출’ 시장이다. 미국이 송전망을 60 퍼센트 늘리려면 변압기, GIS(가스절연 개폐장치), 송전 케이블, HVDC 컨버터, 지중화 자재가 필요하다. 미국 내 변압기 공급은 이미 2년 이상의 리드타임으로 사실상 부족 상태고, 한국의 효성중공업·LS일렉트릭·HD현대일렉트릭과 같은 변압기·GIS 기업들이 이미 대미 수출 비중을 빠르게 늘려왔다. 송전 단계가 본격화되면 이 흐름은 일시적 호황이 아니라 다년간의 산업 사이클로 굳어질 수 있다.
다만 부정적 측면도 있다. 미국이 자국 산업기지에 데이터센터를 더 끌어들이려고 인센티브를 강화할수록, 글로벌 AI 자본 일부는 한국 등 해외 데이터센터 입지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한국이 ‘AI 인프라 핵심 부품 공급국’ 역할은 강화되지만, ‘AI 인프라 입지국’ 경쟁에서는 점점 더 미국 중심성이 커진다는 의미다.
이 점은 미묘하지만 중요하다. 한국 입장에서 미국 전력난은 단순한 호재로 처리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반도체 수요를 더 길게 보장하면서 동시에 한국 데이터센터·클라우드 입지 매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는 양면 변수다.
7장. 시나리오
시나리오 A: 송전 가속화가 작동한다 (확률 25 퍼센트)
FERC Order 1920과 백악관의 송전 행동계획이 실효성 있게 작동해, 신규 송전선 인허가 기간이 단축되고 비용 분담 분쟁이 정리된다. 인터커넥션 큐가 풀리며 2027~2028년부터 데이터센터 신규 부하가 차질 없이 망에 연결된다. AI 인프라 투자 사이클이 안정적 다년 성장으로 이어지고, 한국 메모리·전력기기 양쪽 모두에 호재.
시나리오 B: 부분 해소, 가격 고공행진 지속 (확률 50 퍼센트)
가장 현실적인 경로다. 일부 송전 회랑은 가속되지만, 핵심 다주 회랑은 여전히 정치 분쟁에 막힌다. 하이퍼스케일러는 원전 직거래·자가발전·해외 분산 배치를 병행하며, PJM과 ERCOT의 용량 가격은 높은 수준에서 머문다. 미국 전력 비용 상승이 인플레이션 경로의 새 변수로 자리잡고, 데이터센터 입지가 송전이 가능한 일부 주에 더 집중된다. 한국에는 메모리 호황 + 전력기기 수출 호황이 길게 유지되지만, AI 데이터센터 입지 경쟁에서 한국의 상대 매력은 약해진다.
시나리오 C: 정치 교착, 부분 부하 차단 (확률 25 퍼센트)
송전 갈등이 깊어지고, 일부 주가 신규 데이터센터 접속을 사실상 보류한다. 하이퍼스케일러는 캐나다·북유럽·중동·아시아로 데이터센터 입지를 더 넓게 분산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데이터센터 비상시 부하 차단 조항이 활성화되며, AI 학습 워크로드 일부가 글로벌 차원에서 재배치된다. 한국 메모리 수요는 여전히 강하지만, 변동성이 커지고, 미국 일부 주의 정치 리스크가 글로벌 AI 인프라 자본 흐름의 새 결정 변수로 자리잡는다.
결론
미국이 지금 직면한 것은 ‘전기가 부족하다’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발전소를 짓는 것보다 송전선을 새로 까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주류 거시경제 변수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PJM의 269.92 달러는 이를 가장 깔끔하게 보여준 가격표였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전력의 정치화’다. 송전 용량을 늘리려면 누가 비용을 부담할지, 누가 토지·환경의 대가를 치를지, 어느 주가 다른 주의 부하를 떠안을지를 정치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이 결정이 기술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라는 사실은, AI 인프라 시대의 가장 큰 병목이 더 이상 칩이 아니라 망이라는 점을 뜻한다.
한국에는 이 흐름이 양면으로 닿는다. 한쪽으로는 AI 메모리·고성능 패키징 수요의 수명이 더 길어진다. 다른 한쪽으로는 미국 송전망 보강 자재 시장이라는 새 수출 모멘텀이 열린다. 동시에 글로벌 AI 자본의 입지 결정에서 한국의 상대 매력은 ‘송전이 가능한 미국 주’와 비교돼 다시 평가받게 된다.
데이터센터는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데이터센터에 전기를 흘릴 길은, 미국 정치가 새로 깔아야 한다. 다음 1~2년 동안 워싱턴과 주 의회에서 벌어질 송전 정치는, 단지 미국 내부의 인프라 논쟁이 아니라 글로벌 AI 사이클과 한국 산업의 다음 단계까지 결정하는 분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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