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피의 유산, 총성에 스러지다: 사이프 알 이슬람 암살과 리비아의 미래
2026년 2월 3일 밤, 리비아 서부 진탄(Zintan)의 한 저택에서 총성이 울렸다. 네 명의 복면을 쓴 무장괴한이 침입해 CCTV를 차단한 뒤, 집주인과 “직접 대치”를 벌였다. 그 집주인은 53세의 사이프 알 이슬람 가다피—42년간 리비아를 통치한 무아마르 가다피의 아들이자, 한때 “차세대 지도자”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리비아 검찰은 부검 결과 사인이 “총상에 의한 사망”임을 확인했으며, 범인 추적에 나섰다. 그러나 이 암살의 배후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것이 리비아의 정치 지형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1장. 두 얼굴의 후계자
사이프 알 이슬람 가다피는 1972년 트리폴리에서 태어났다. 무아마르 가다피의 두 번째 부인 사피아 파르카쉬 소생의 둘째 아들로, 공식적인 정부 직함 없이도 리비아에서 아버지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혔다.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유창한 영어와 서구적 매너로 “개혁의 얼굴”을 자처했다. 2000년대 리비아의 서방 관계 복원을 주도하며 록커비 테러 피해자 보상 협상, 핵무기 포기 협상을 이끌었고, 2005년 세계경제포럼(WEF)은 그를 “젊은 글로벌 리더”로 선정했다. 다보스 포럼 창립자 클라우스 슈밥이 직접 2011년 1월 다보스 참석을 초청할 정도였다.
그러나 2011년 아랍의 봄이 리비아를 덮쳤을 때, 개혁가의 가면은 벗겨졌다. 그는 시위대를 “쥐떼”라 칭하며 무력 진압을 공개 옹호했고, “우리는 여기 리비아에서 싸우고, 여기서 죽는다”고 선언했다. 그해 6월 국제형사재판소(ICC)는 그에게 “인도에 반하는 죄”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아버지 가다피가 10월 시르테에서 반군에게 붙잡혀 처형된 뒤, 사이프는 베두인 복장으로 위장해 알제리 국경을 향해 도주했으나 진탄의 민병대에 체포됐다. “밖으로 나가면 총알 세례가 쏟아질 것”이라며 항복을 거부했던 그는 결국 6년간 진탄 감옥에 수감됐다.
2장. 두 개의 정부, 하나의 국가
사이프 암살을 이해하려면 리비아의 복잡한 정치 지형부터 알아야 한다. 2011년 가다피 정권 붕괴 이후, 리비아는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갈라졌다.
서부의 트리폴리에는 UN이 인정한 국민통합정부(GNU)가 있다. 압둘 하미드 드베이바(Abdul Hamid Dbeibah) 총리가 이끄는 이 정부는 국제 사회의 공식 파트너이지만, 실질적 통제력은 수도권에 한정된다.
동부의 토브룩에는 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과 오사마 함마드(Osama Hammad)가 이끄는 국민안정정부(Government of National Stability)가 있다. 그 뒤에는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 장군이 지휘하는 리비아국민군(LNA)이라는 강력한 무력이 버티고 있다.
두 정부 사이에는 민병대, 부족 연합, 이슬람주의 세력이 각자의 영역을 나눠 지배하고 있다. 2023년과 2025년에 트리폴리에서는 대규모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2023년 9월 데르나(Derna) 홍수 참사 때는 6,000명 이상이 사망하면서 양쪽 정부 모두의 무능이 드러났다.
이 혼란 속에서 사이프 알 이슬람은 독특한 정치적 틈새를 노렸다.
3장. 귀환의 꿈, 그리고 좌절
2017년, 동부 정부가 발표한 사면으로 석방된 사이프는 진탄에 머물렀다. 표면적으로는 조용히 살았지만, 물밑에서는 부활을 준비했다.
2021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10년간 리비아 국민과 떨어져 있었다. 천천히 돌아가야 한다. 스트립쇼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사로잡아야 한다.”
그해 11월, 그는 남부 세브하(Sabha)에서 깜짝 등장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전통 복장을 입고 나타난 그는 10년간의 혼란에 지친 국민들의 향수에 호소했다. 일부 리비아인들 사이에서는 “가다피 시절이 그래도 안정적이었다”는 정서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발도 거셌다. 2015년 트리폴리 법원의 사형선고, ICC의 체포영장이 그의 출마 자격을 둘러싼 논란을 일으켰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그를 자격 박탈했고, 항소심 진행 중 무장세력이 법원 접근을 막으면서 선거 자체가 무산됐다. 2021년 12월로 예정됐던 리비아 대선은 무기한 연기됐고, 지금까지 치러지지 않았다.
4장. 누가 그를 죽였는가
범인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리비아 언론인 압둘카데르 아사드는 BBC에 여러 가능성을 제시했다.
첫째, 지역 정치 세력의 소행. 사이프의 인기가 상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위협받는다고 느낀 세력이 그를 제거했을 수 있다. 진탄과 그 주변의 민병대들은 사이프에게 보호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그의 정치적 야망이 자신들의 이해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둘째, 외국 세력의 개입. 사이프의 과거 행적—서방과의 협상, 핵 포기, 록커비 보상—은 그를 다양한 국가들의 관심 대상으로 만들었다. 일부 분석가들은 프랑스와 미국이 리비아 정치 재편을 위해 하프타르와 드베이바 양측에 접촉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사이프의 제거가 이 협상의 장애물을 치우려는 움직임일 수 있다고 추측한다.
셋째, 2011년의 복수. 가다피 정권에 의해 고통받은 수많은 리비아인들에게 사이프는 여전히 증오의 대상이었다. BBC의 존 심프슨 기자는 “많은 리비아인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품었던 혐오가 그에게로 이어졌고, 이것이 그의 죽음을 초래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흥미롭게도, 사이프의 여동생은 리비아 TV에 그가 알제리 국경 근처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해 공식 발표와 상충하는 정보를 내놓았다. 이러한 상충되는 보도들은 사건의 진상이 단순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5장. 리비아의 내일
사이프 알 이슬람의 죽음은 리비아 정치에서 하나의 변수를 제거했다. 그러나 이것이 안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다피 지지 세력의 반발 가능성. 리비아 남부와 일부 부족들 사이에는 여전히 가다피 정권에 대한 향수가 있다. 사이프의 암살이 이들의 결집을 불러올 수 있다. 그의 정치팀은 성명에서 암살을 “비겁하고 배신적인 행위”라 규정했다.
권력 공백의 위험. 2021년 대선이 무산된 이후 리비아에는 국민의 직접 선출을 받은 지도자가 없다. 두 정부 모두 정당성이 취약한 상황에서, 사이프라는 “제3의 대안”이 사라진 것이 정치적 타협을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국제 사회의 대응. ICC는 사이프에 대한 체포영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리비아에 대한 실질적 개입은 제한적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국제 사회가 리비아 안정화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인지, 아니면 현상 유지에 머물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결론: 끝나지 않은 이야기
사이프 알 이슬람 가다피는 모순의 덩어리였다. 개혁가이면서 탄압의 공모자, 서방의 파트너이면서 ICC의 수배자, 죄수이면서 대선 후보. 그의 삶은 리비아 현대사의 복잡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리비아에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남긴 것은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뿐이다. 누가 그를 죽였는가? 이것이 새로운 폭력의 시작인가? 리비아는 언제 통합된 정부를 갖게 될 것인가?
2011년 텔레비전 연설에서 사이프는 경고했다. “리비아 전체가 파괴될 것이다. 어떻게 나라를 운영할지 합의하는 데 40년이 걸릴 것이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렀지만, 그의 경고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26년 2월 5일 작성 | EcoStream 리서치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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